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는 현재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전시가 한창이다.
동시간대에 진행 중인 까르띠에 재단의 미술품 전시와 달리 루이비통의 전시는 메종의 역사를 정리하는 브랜드 전시여서
(까르띠에 재단의 전시도 물론 좋았으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큰 기대를 가진 채 전시를 관람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Volez, Voguez, Voyagez)'다.
이 타이틀은 루이비통 최초의 로고가 반영된 여행 가방 첫 광고 카피에서 따온 것으로,
역사 속 다양한 여정을 함께 했던 루이비통 트렁크와 러기지를 만나게 될 전시라 그런지
입구에서부터 '여행을 떠나보라'는 메세지를 던지더라.
저 자리에 서서 몸을 살짝씩 움직여보면,
저기 눈 앞에 보이는 전시장 입구 외벽에 스크리닝 되고 있는 비행기가 몸을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방향을 트는
별 것 아니지만 참 관람객을 들뜨게 만들어주는 재미있는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시는 소개하는 작품의 수가 굉장히 많고
평소에 절대 접할 수 없는 진귀한 유산들을 대거 등장시키기 때문에
무료 전시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탈리아 방문시 들렀던 구찌 박물관은 유료 티켓으로 입장을 했었는데, 이 전시가 그 박물관의 규모보다 훨씬 컸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전시는 단순히 루이비통 앤티크 트렁크로만 채워진게 아니라
루이비통 아카이브에 소장된 오브제들과 파리 의상 장식 박물관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 Musée de la Mode de la Ville de Paris),
프랑스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 산하 음악박물관(Musée de la Musique) 소장품 및 개인 컬렉션들까지 가세해
마치 브랜드의 역사가 아닌, 한 나라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8월 말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전시는 블로그 포스팅이 아닌 실제 방문 관람으로 직접 확인했으면 한다.
(사진을 찍긴 했으나 찍지 않은 것이 더 많으며, 찍은 것도 거의 클로즈업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궁금하다면 꼭 DDP를 방문하도록.)
전시장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앤티크 트렁크.
루이비통의 광고 엽서들.
아래에 있는 엽서들에는 지금의 다미에 캔버스 패턴이 함께 그려져있다.
1800년대 유럽 부유층들이 주문 제작해서 사용했던 다양한 형태의 앤티크 트렁크 아카이브.
트렁크가 처음 만들어졌던 1850년대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다미에 캔버스(Damier canvas) 패턴은 모조품이 생겨나기 시작한 1880년대에 만들어졌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노그램 캔버스(Monogram canvas) 패턴은 1890년대에 만들어졌다.
한약방 서랍장 같은 이 케이스는 각각 1켤레의 신발을 담는 서랍장이다.
당시 부유층의 삶이 얼마나 유별나고 과시적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
결코 본인들이 직접 들고 다녔을 리 없으니 트렁크의 크기가 실용성과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꽃을 담은 것이 아니고 꽃모양의 장식이 달린 모자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것 중 하나가, 각 섹션별로 공간 디자인이 엄청나게 멋지게, 그럴 듯 하게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무대 세트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모두 로버트 칼슨(Robert Carsen)의 작품이다.
덕분에 동선따라 전시장을 이동하면서 '전시를 본다'는 느낌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 공간이 주는 무드에 제대로 심취해서 더욱 더 작품들을 가슴으로 볼 수 있도록 한 것 같아 아주 인상적이었다.
현재의 여행 가방의 시초가 된
1900년대에 처음 개발 된 스티머 백(Steamer Bag).
이후 모노그램 캔버스와 다미에 캔버스를 입기도 했었다.
(각 피스마다 이렇게 번호표와 함께 캡션이 달려 있어 하나씩 보는 재미가 좋았다)
아프리카 횡단 탐험가 앙드레 시트로엥을 위해 특별 주문 된 알루미늄 트렁크 시리즈.
※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동차 제조회사 시트로엥 때문일텐데, 실제 그 양반이 그 시트로엥의 창업자다.
그를 위해 침대 트렁크라는, 아주 희한한 물건도 만들어졌다.
트렁크 속에 저 침대가 쏙 들어가는 구조다.
(라꾸라꾸 침대 생각이 나는 건 기분탓)
캬-
부유층의 삶은 얼마나 호화로웠을까.
1910년대엔 무려 바이스(작업 공구)를 담는 트렁크도 있었다.
이건 일반적으로 차량 위나 뒤에 적재하는 모노그램 캔버스의 차량용 트렁크고,
이건 모토블록이라는 자동차 회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차량용 트렁크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롤스로이스 에디션 같은 개념일 듯.
이건 휴대용 선풍기라는데 귀여워서 사진으로 남겨뒀다.
1930년대의 노에 백(Noe Bag)과 피크닉 트렁크.
옷이 아닌 식기류를 챙겨다니는 여행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니
부유층의 삶의 사치스러움이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순간.
이건 피크닉 트렁크도 아니고, 그저 티타임을 위한 티 케이스다.
쓸모 없는 공간 같은 건 애초에 남겨둘 마음도 없었다는 것 같은 배열.
마침내 비행기의 등장.
땅을 너머, 하늘로.
역시 빠질 수 없는 루이비통 백.
(바로 전 사진을 다시 자세히 보면, 드디어 키폴 백(Keepall Bag)이 등장했다)
빠삐용 백(Papillon bag NM)이 등장했다.
시대가 발전하고 삶이 개인화, 대중화 되며 점점 가방의 크기가 작아지고 실용적으로 바뀌는 것이 보인다.
기차 여행을 위한 캐빈 트렁크와 익스프레스 백의 개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 디자인.
마치 실제 열차 안에 있는 것 같았던 순간.
여행광, 독서광이자 루이 비통의 손자였던 가스통 루이비통(Gaston-Louis Vuitton)이 실제 여행하며 모았다는 호텔 스티커들.
책을 좋아했던 가스통 루이비통의 영향 때문인지 이후에는 집필 트렁크나 책장 등이 대거 제작되기도 했다.
이 마저도 결국 여행시 휴대하기 위함이었을테니,
과연 정말 유난이었다 할 수 있겠다.
과거와 현재에 만들어진 것을 같이 놓고 보니 그 또한 쏠쏠한 재미다.
타자기를 담는 트렁크의 등장.
이 곳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무겁고 큰 것을 들고 다녔구나 하니
정말 과거의 부유층들은 유별났다는 생각 그리고,
지금의 스마트폰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에 대한 생각.
심지어 이렇게 책상으로 펼쳐지는 패널까지 만들었구나.
"이야~" 라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이 공간은 사방이 모노그램이더라.
정말 루이비통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마치 나도 모노그램 캔버스의 트렁크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
비교적 최근의 백도 군데군데 전시 되고 있었는데
워낙 진귀한 트렁크의 향연에 취해있다보니 어째 이런 컬렉션은 좀 튀는 느낌.
그래도 나름 한시대를 풍미했던 마크 제이콥스의 모노그램 그래피티 시리즈 아니겠나.
굳이 끼워 맞추자면, 어쩌면 지금 구찌(Gucci)의 과감한 행보를 이끌고 있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작업도
마크 제이콥스의 이런 파격적인 작업 같은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루이비통의 앤티크 트렁크 커스터마이징 서비스 메뉴(?).
가방의 생김새, 여닫는 법, 그리고 트렁크를 만드는 데에 필요했을 다양한 질문들.
당연히 있었을 서비스지만 이렇게 실제 사용되었던 작성표를 보니 기분이 또 묘하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봤을 무라카미 타카시의 모노그램 멀티컬러 작품.
하지만 진귀한 트렁크 컬렉션에 빠져있다 보니 오히려 너무 튀는 조우였다.
지금 보니 이것도 정말 튀는구나.
옷이 접힌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옷걸이를 만들고 옷이 걸리는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하려 했던 것을 보면.
갑자기 퍼퓸?
지팡이!
숨막힐 정도로 한 치의 여백도 용납하지 않은 완벽한 수납.
V
지금으로 치면 캐리어 위에 다양한 브랜드 스티커를 붙이는 것처럼,
그 옛날에도 이렇게 트렁크 위에 호텔의 엽서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을까.
전시의 후반부에서는 협업에 적극적이었던 루이비통의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백과 트렁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컬러풀한 트렁크는 상단에 거울이 있던 것으로 보아 메이크업 셋트인 듯 하다.
캡션을 보지 않아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는데
문득 이 지점에서 전시 초반에 마주했던 앤티크 트렁크들 생각이 문득.
더욱 화려해지고, 더욱 섬세해졌지만, 여전히 루이비통의 트렁크는 계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구나.
아래로는 다양한 협업의 결과물들.
레이 카와쿠보다운 재해석.
반가운 프라그먼트(Fragment) 디자인의 번개로고.
쿠사마 야요이와 함께 했던 컬렉션도 실제로는 처음 본다.
보석 상자의 클래스.
마크 제이콥스의 모노그램 그래피티 보다는 훨씬 잘 어울리는 느낌.
서울에서도 팝업 스토어를 오픈한, 루이비통 x 슈프림 컬렉션의 트렁크도 여기서 실물을 마주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슈프림(Supreme) 제품을 '정식'으로 판매하게 된 국내 최초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루이비통.
삼성도 실패한 일을 진짜 '어쩌다 보니' 루이비통이 이뤄냈구나.
루이비통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전시의 마지막 공간은 한국을 위한 헌정 섹션이었다.
1900년 프랑스와 한국이 나란히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전시회에 참여한데 의의를 두고 만들었다는 가야금을 담는 앤틱 트렁크.
이런 섬세한 디테일 아니, 고집스러운 디테일은 루이비통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박물관에서 막 꺼내온 듯한 한국의 오래된 패션 매거진도 볼 수 있었다.
월간 '멋'이라니.
진짜 멋있다.
루이비통에 대한 조명은 당시에도 여전히.
보통 895개의 못이 사용된다는 대목에서 흠칫.
셋팅이 좀 억지스러웠지만, 좋게 봐준다.
이 모든 전시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전 피겨 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의 스케이트를 보관하는 트렁크다.
반가운 이름, 대한민국의 자랑, 빙판 위 요정 김연아의 영문 이니셜 YN.K
저 서랍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었을까.
사용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스케이트.
잠시 전시장에서 벗어나, 김연아에 대한 여러가지를 추억하게 되었던 순간.
덕분에 루이비통 전시에 대한 몰입은 깨졌지만
그만큼 루이비통의 위상과 위치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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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다 보고 나올 때에는 루이비통의 가방과 네임 태그를 만드는 장인들의 실제 작업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현지에서 온 장인들이 실제 작업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공간에 당도했는데,
안타깝게도 방문했던 시간이 전시장이 문을 닫을 시간에 가까웠던지라 장인들이 퇴근 준비를 하고 계셨...
...
기대가 크긴 했으나 이렇게 양질의 전시를 보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어서 굉장히 감탄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앞서 얘기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방문했던 구찌 박물관은 유료 전시인데
그 전시도 충분히 훌륭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루이비통 전시 규모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니.
큐레이팅이 굉장히 잘 된 전시고 공간의 구성이나 표현력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 전시였다.
나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 볼 생각이다.
카메라 없이 좀 더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루이비통 메종의 역사를, 트렁크 산업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 볼 참이다.
부디 이 블로그를 봤으니 됐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정말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갑절 이상의 엄청난 감동을 가져다 주리라 확신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