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수트 맞출 일이 있었다.
어릴 땐, 아니 사실 지금과 가까운 얼마 전의 시점까지도 나는 브랜드 수트, 그러니까 기성복을 입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이다.
내 주제에 맞춤은 무슨, 비스포크(Bespoke)는 무슨.
20대를 지나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이제는 30살보다는 40살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니,
슬슬 그런 브랜드에 대한 욕심은 전보다 많이 사라졌다.
아 물론, 유서 깊은 브랜드가 주는 신뢰는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카이브가 되고 히스토리가 탄탄한 브랜드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 관심은 그 기준에서만 보면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단지 이제는 화려함보다는 나에게 잘 맞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 지켜나아가야 할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기초로 하는 그런
흔들림 없어야 할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고 깨달았을 뿐.
발렌타인(Ballantine's) 21년과 30년산을 보면 마치 지금의 내 모습, 그리고 앞으로이길 바라는 내가 그리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21년산에는 'Very Old', 30년산에는 'Very Rare'라고 적혀있는데, 내가 올드하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내 나이를 뜻하는 건 아니고.
내가 느끼는 21년산은 뭐랄까 -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하지만 제법 삶의 이치를 알아가고 있는 그런 연령대?
부드럽고 상큼하지만 묵직하고 달달한 맛이 섞인 그런 맛이라
고리타분하게 볼 순 없지만 철딱서니 없는 것과도 거리가 먼 그런 느낌이다.
적당히 까불 줄 도 알고 적당히 점잖 떨 줄도 아는 그런 지금의 나와 비슷한.
30년산은 그에 비하면 확실히 원숙한 느낌이 강한 것이 차이라 하겠다.
좀 더 어른같고, 좀 더 여유 넘치고, 좀 더 품격 있고 (케이스부터가 이미)
달콤한 바닐라 맛이 나지만 그것이 절대 가볍지 않은,
세상은 다 그런거란다 - 라고 말할 줄 아는?
세월의 풍파를 제대로 경험해 본 그런 어른 같은 느낌.
내가 되고 싶은 그런 어른.
수트를 맞추면서 테일러 마스터와 '가치'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살면서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고, 또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또, 그런 가치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자생적 가치인지.
지금은 확실히, 자극적이고 빠른 것보다는 오래 둘 수 있고 여유로운 것에 더욱 관심이 많아졌고
그런 것들이 앞으로의 내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늘 교훈이라는 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법이니.
진정으로 나를 위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어지는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
40살에 가까워 진 지금, 아니 요즘,
나는 참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어른에 대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